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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는데 (일상의 위로, 작은 것의 가치, 느림의 미학)

by minbear3041 2026.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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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는데 책 표지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는데 책 표지


솔직히 저는 에세이집을 펼칠 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요즘 쏟아지는 힐링 에세이들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는데'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구에서 영감을 받은 이 책은 중학교 교감 선생님인 이창수 작가가 오랜 교직 생활에서 만난 사람들과 순간들을 62개의 짧은 에피소드로 엮어낸 작품입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는 출근길 지하철 안이었습니다. 뒤쪽부터 무작위로 골라 읽기 시작했는데, 한 편 한 편이 마치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조용히 건네는 이야기 같았습니다.

당신은 왜 나무만 보고 풀은 보지 않나요

큰 나무가 태풍을 견뎌낸 후, 나그네는 나무의 상처만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 옆에서 함께 비바람을 맞은 풀잎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내게도 상처가 있어요. 나를 위로해 주세요." 책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 장면이 제 가슴을 먼저 쳤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주변의 '나무'들만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SNS에서 화려한 성공 스토리를 올리는 사람들, 언론에 오르내리는 유명인들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쏟았죠.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습니다. 매일 옆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동료도, 퇴근길 지하철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낯선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요.

'감정이 상하면 논리는 없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후통첩 게임 실험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람들은 10만 원이라도 받는 것이 이익임에도 불구하고 불공평한 제안을 거절한다는 내용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정말 맞는 얘기입니다. 회사에서 누군가와 의견 충돌이 있을 때, 상대방이 논리적으로 맞는 말을 해도 제 감정이 상한 상태라면 절대 수긍이 안 되더라고요.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배려는 사람을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다. 대화할 때 배려라는 따뜻한 빛을 상대방에게 비추자."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제가 누군가의 풀잎을 밟고 지나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빨리 가면 놓치는 것들이 있지 않나요

'천천히 보면 다른 게 보인다'는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제 여행 방식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늘 빠른 교통편을 선택했습니다. SRT로 부산 가고, 비행기로 제주도 가고. 빨리 도착해서 많이 보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작가가 노르웨이에서 느린 열차를 타고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느낀 감동을 읽으니, 제가 놓친 게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남대교를 버스로 건너며 "흘러가는 것이 물만이 아니다. 햇빛도 얹혀 있고 바람도 실려 있고, 강물에 비친 하늘도 흐른다"고 표현한 부분에서는 잠시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실제로 써보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다음 주말에 일부러 완행열차를 타고 강릉에 다녀왔는데,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농촌 풍경을 보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과정이 더 값질 수 있다는 걸, 40대가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이라는 에피소드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고은 시인의 짧은 시구인데, 왜 이렇게 마음에 오래 남는지 모르겠습니다. 목표만 보고 달려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돌아서거나 여유를 가질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도종환 시인의 구절을 인용하며 말합니다. 힘든 시기를 겪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모든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다고. 이 문장을 읽으면서 제 20대의 방황과 실패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너무 괴로웠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들이 제를 단단하게 만들었더라고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제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빨리, 많이가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샘터의 글을 읽던 옛날 느낌도 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62개의 에피소드 중 로또 이야기가 세 번이나 나오는 것도 웃겼고, '하하하 취임사' 편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국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큰 나무의 상처만 위로할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작은 풀잎들도 보살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풀잎이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한여름 슬리퍼를 신고 들녘을 걷는 기분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읽고 나면 생각보다 깊은 여운이 남습니다. 가끔씩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위로하는 것, 그게 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이 아닐까요.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E9Fx7CTB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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