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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질문 (왜그래와 괜찮아, 모름의 지혜, 고통과 함께 살기)

by minbear3041 2026.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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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질문 책 표지
인생의 마지막 질문 책 표지


저는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책에서만 보던 '인생의 질문'들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그때 저는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답은 없었고, 오히려 질문은 저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정재형 교수의 '인생의 마지막 질문'이라는 책은 제게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종교철학 주임교수인 정재형 교수가 철학서와 고전, 현대문학을 넘나들며 삶의 깊이를 더하는 100가지 지혜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모르고도 살 수 있고, 살고도 모르는 것이 삶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왜그래에서 괜찮아로, 삶이 가르쳐준 전환

처음 아이를 키우면서 저는 아기의 울음 앞에서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배고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계속 우는 아이를 보며 저는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왜 그래?" 그런데 책에서 본 한 엄마의 이야기가 제 경험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생후 2개월 된 아기가 이유 없이 저녁마다 3시간씩 울었고, 엄마는 "왜 그래?"라고 물으며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괜찮아"라고 말했더니 신기하게도 아이의 울음이 누그러졌다는 이야기입니다(출처: 추수밭 출판사).

여기서 '왜 그래'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불만과 신경질의 표현입니다. 이는 인지적 질문(cognitive question)이 아닌 정서적 반응(emotional response)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 이유를 묻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왜?"라고 물으며 사실은 제 무력함을 토로하고 있었던 겁니다.

정재형 교수는 이런 순간에 필요한 것은 '왜'에 대한 답이 아니라 '괜찮아'라는 수용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라 삶의 모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 통찰을 경험한 후 제 안에서 흐느끼는 또 다른 목소리들에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에서는 이를 "내 안에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중요한 것은 '괜찮아'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수한 '왜 그래'의 씨름을 거쳐야만 진정한 '괜찮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2024년 한국심리학회 연구에 따르면, 부정적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충분히 경험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빠르게 심리적 회복을 이룬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저 역시 '왜'라는 질문을 충분히 던진 후에야 비로소 '괜찬아'라는 말이 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무지, 그리고 자기중심의 함정

저는 오랫동안 제가 아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제 전공 분야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서 일하면서 제가 배운 이론들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존중하며, 편견은 무지의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이 문장이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편견(prejudice)은 두 가지 모순된 특징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편견이란 충분한 근거 없이 형성된 고정된 믿음을 의미하며, 무지(無知)에서 비롯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왜 그렇게 확신에 차 있을까요? 정재형 교수는 바로 무지이기 때문에 최강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기 때문에 의심 없이 단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신기한 것과 낡은 것을 제 기준으로 명확히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책에서는 "신기한 것이 변해 낡은 것이 되고, 낡은 것이 다시 변해 신기한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성과 소멸의 순환 원리입니다. 제가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싫어하던 것이 다시 좋아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겁니다. 새집으로 이사했을 때의 들뜬 기분이 몇 개월 지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손에 넣은 것이 자기 안에서 변하지 않기에 질린다. 결국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쉽게 싫증을 느낀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문제가 대상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변하지 않으니 똑같은 것에 계속 싫증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편견을 버리기 위해서는 제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모르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고통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

제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 주변 사람들은 저를 위로한답시고 여러 말을 건넸습니다. "하느님이 좋은 일에 쓰시려고 데려가셨어",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말들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고통을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작가 박완서도 아들을 잃은 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그렇다면 어느 의로운 부모가 자식에게 정의나 도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여기서 '위하여'라는 말의 양면성을 볼 수 있습니다. 좋은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위로는 동시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가"라는 저주의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논리는 착하게 살라는 교훈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고통에 원인을 부여하여 사람들을 정죄와 저주의 틀에 가두기도 합니다. 여기서 권선징악이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한다는 전통적 윤리관을 의미하며, 이는 인과응보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저는 박완서의 고백에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장이 제게는 어떤 철학서의 명문장보다 진실되게 다가왔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재형 교수는 성서의 선지자들과 예언자들도 "하느님이 왜 잠자고 계시는가"라고 절규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테레사 수녀조차 "하느님이 과연 살아 계시기나 한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본회퍼의 '무신성의 실험'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기서 무신성이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신이 계시더라도 대답을 듣지 못하는 현실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런 정직한 고백들이 오히려 삶의 진실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제 경험상 고통 앞에서 필요한 것은 섣부른 답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책이 말하는 '겪으면서 견디고, 견디면서 겪는 오묘한 삶의 길'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질문들에는 명쾌한 답이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히려 답을 찾으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모름'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지혜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재형 교수가 말했듯이 "지혜는 앎이 아니라 모름에서 나온다"는 말이 이제는 저에게도 실감납니다. 여러분도 삶의 무게에 지쳐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왜'가 아닌 '괜찮아'로, '극복'이 아닌 '함께 가기'로의 전환을 경험해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cbE7MPm_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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