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갱년기'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저 호르몬 변화로 인한 신체적 증상만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임선경 작가의 <나이 먹고 체하면 약도 없지>를 읽고 나니, 갱년기가 단순히 견뎌야 할 시기가 아니라 다시 한 번 자신을 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는 '제2의 사춘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50세에 맞이한 갱년기를 유쾌하고 솔직하게 풀어내면서, 나이 드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합니다. 제가 이 책을 남편에게 선물받아 단숨에 읽어버린 이유도,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너무나 공감되는 대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갱년기, 다시 맞이하는 사춘기
일반적으로 갱년기는 여성이 피하고 싶어 하는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는 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갱년기는 사춘기처럼 정신과 신체가 격변을 겪는 때"라며, "사춘기처럼 예민하게 느끼고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왕성하게 배우고 무한히 감동하며 훌쩍 자랄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제 경험상 주변의 많은 중년 여성들이 갱년기를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이 시기야말로 양육의 부담과 사회적 의무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며 '나'를 찾을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저 역시 나이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 시기를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가장 열심히 꾸준히 한 일이 바로 나이 먹는 일"이라고 말하며, 이제야 나이 먹는 일에 대해 가만 들여다보고 곰곰 생각해본다고 고백합니다. 허겁지겁 먹기만 바빴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먹어야 체하지 않고 잘 먹을 수 있을지 생각하는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아줌마의 수다가 시끄러운 진짜 이유
작가는 '아줌마들은 시끄럽다'는 편견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모임이 시끄럽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단순히 목소리가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작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아줌마들은 목소리가 큽니다. 이는 "도대체 말을 들어먹지 않는 인간들"과 같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말을 해도 잔소리로 들으니 점점 목소리를 높이게 되고, 특히 사춘기 자녀들의 '선택적 난청' 증상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두 아들을 키우며 예전보다 목소리가 커진 것을 실감합니다. 강연장에서 마이크 없이도 말할 수 있을 정도라는 작가의 고백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둘째, 그리고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인데, 아줌마들의 대화는 오디오가 '물립니다'. 한 사람 이야기를 진득하게 듣지 않고 서너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휘가 생각나지 않는 빈도가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배우 이름이 뭐더라"로 시작되는 대화는 모두가 머릿속 물방울을 떠올리며 함께 추리해야 진행됩니다.
작가의 표현대로 '대화의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독점도 없고 소외도 없으며, 서로 돕고 도움받는 인터랙티브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제가 친구들과 만날 때도 이런 경험을 자주 하는데, 이제는 이것이 단순히 시끄러운 게 아니라 나이 들며 자연스럽게 생기는 협력의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엄마와 자식 사이의 거리두기
작가는 자식과의 관계 변화를 매우 솔직하게 풀어냅니다. 길에서 우연히 아들을 만났는데, 아들이 친구들 눈치를 보며 빠르게 다가와 "왜요? 뭐가 뭔데요?"라고 묻는 장면은 많은 부모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제가 길에서 12본는 불량배도 아니고 저랑 다른 촌수로 따지면 1촌인데"라는 작가의 푸념에 저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자녀에게 언제나 환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험상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라면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작가는 이를 "상실감과 분노와 무기력감과 슬픔"으로 표현하며, "같은 집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살지만, 예전의 그 살들은 애정만 거두어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 시기를 '짝사랑'에 비유하며 나름의 대응 방식을 찾습니다. "짝사랑도 바쁘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많다"며, 근처에서 얼쩡거리다가 우연을 가장해 자꾸만 맞닥뜨릴 기회를 만들고, 너무 치되거나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작가가 포기와 체념을 '대타협'이라 부르면서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기억은 수집하는 것
작가는 인생의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기억뿐이라고 말합니다. 스티브 잡스의 말을 인용하며 "사랑으로 기억되는 추억"이 진정한 부라고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사건이나 성취를 인생의 중요한 순간으로 여기지만, 제 경험상 오래 남는 건 오히려 사소한 순간의 감정들이었습니다.
작가는 아들 제재의 '설정에 충실한 삶'을 예로 듭니다. 봄밤에 자전거 타기, 영화 볼 때 팝콘 먹는 타이밍, 아플 때 침대에 누워 엄마의 간호 받기 등 제재는 각 순간에 어울리는 설정을 충실히 이행합니다. 작가는 이런 태도가 "상황에 충실하게 사는 것, 그 순간의 감정에 충분히 푹 빠지는 것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제 아이들과의 시간을 떠올려보면, 거창한 여행이나 이벤트보다는 함께 웃었던 작은 순간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작가의 말처럼 기억은 저절로 모이는 게 아니라 애써 모으고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과 캠핑을 가면 와인잔을 챙기고, 피크닉을 가려고 예쁜 매트를 사는 수고가 바로 기억을 수집하는 과정입니다.
특히 작가가 강조하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소소하게 자꾸만 여러 번 행복해야 대체로 행복한 것이고, 작은 경험을 자꾸 소화하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좋은 감정을 여러 번 다시 느끼는 것이 끝까지 잃지 않는 행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평범한 일상이 사실은 가장 특별하고 잊을 수 없는 순간들로 채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이 먹는다는 것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누릴 수 있게 되는 과정일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특히 갱년기를 앞두고 있거나 한창 겪고 있는 분들,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 변화로 혼란스러운 엄마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습니다.